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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민기 기자 > 미국이 독립한 초기, 미국인들 사이에서는 공개 처형이 교훈을 주는 것인지, 아니면 단 순히 국가가 파괴할 수 있는 힘을 과시하는 것 일 뿐인지에 대한 논쟁이 있었다. 미군 총살형 집행대에 의한 니달 하산( Nidal Hasan) 의 처형을 생중계하겠다는 계획 은, 오래된 질문을 다시금 대중의 논의를 테 이블 위에 다시 올려놓았다. 육군 정신과 의 사였던 하산은 2009년 텍사스주 포트 후드에 서 13명을 살해한 혐의로 군사법원에서 유죄 판결을 받았고, 2026년 12월 3일에 처형될 예 정이다.
피트 헤그세스 국방장관은 니달 하산의 죽 음을 공개하려는 계획에 대해 사람들은 이런 행동에는 심각한 대가가 따른다는 점을 이해 해야 한다고 설명했다. 그러나 공화당과 민주 당 양측 모두로부터 거센 반발이 일자, 도널 드 트럼프 대통령은 2026년 10월 15일 소셜 미 디어를 통해 하산의 처형을 생중계하지 않겠 다고 발표했다. 트럼프는 생중계 취소를 알리는‘ 트루스 소 셜’ 게시물에서 처형 장면을 모두가 볼 수 있 게 생중계하는 것은, 미국이 테러리스트나 하 산 같은 인간 쓰레기들을 어떻게 처리하는지 전 세계가 목격하게 함으로써 강력한 억제력 이 될 수 있었을 것이라고 적었다. 초기 미국 공화국 역사를 연구하는 역사가는 누군가 죽어가는 모습을 보는 것이 유익한 교 훈을 줄 것이라는 이런 익숙한 기대를 잘 알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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있다. 미국 건국 초기에도 사람들은 바로 이 전제를 두고 논쟁을 벌였고, 과연 그것이 어떤 교훈을 줄 수 있을지에 대해 의문을 제기했다.
정부의 권력 1797 년 8 월 17 일, 뉴욕 시민들은 존 영( John Young) 이 교수형에 처해지는 모습을 보기 위 해 모여들었다. 빚에 시달리던 영국 출신 음악 가이자 악보 출판업자였던 존 영은, 자신을 체 포하러 온 보안관 대리 로버트 바윅을 총으로 쏴 살해했다. 바윅은 아내와 아홉 명의 자녀를 남겼다. 배 심원단으로부터 유죄 평결을 받은 존 영은 군 인들에게 둘러싸인 채, 수많은 군중 앞에서 교 수대에 세워졌다. 당시 뉴욕 주지사였던 존 제이는 대중의 판 단보다는 강력한 정부를 더 신뢰했던 연방주 의자( Federalist) 였다. 그는 보안관으로부터 피고인이 구출될지도 모른다는 우려를 보고 받고 군대를 배치하도록 승인했다. 하지만 존 제이는 동시에, 처형을 지켜보는 이들에게 이를 집행하는 정부의 권력을 각인 시키고자 했다. 교수형 집행 이틀 전, 존 제이 는 뉴욕시의 최고 법무 책임자인 제임스 켄트 에게 보낸 서한에서 법의 권위가 분명하게 드 러나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는 이번 행사가 매 우 엄숙하고 인상적이어야 하며, 법의 권위가 모든 저항을 압도하는 모습이 보여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엄숙한 분위기를 조성하기란 쉽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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않았다. 교수대로 향하는 행렬에서 군 호위대 가 경쾌한 음악을 연주했기 때문이다. 한 신문 비평가는 상황을 잘 모르는 행인이라면 이 광 경을 어떤 축제의 기념행사로 착각할 수도 있 었을 것이라고 꼬집었다.
군인들이 교수대 주위를 사각형 형태로 에 워쌌다. 군중은 질서를 잘 지켰다. 한 신문 보 도에 따르면, 존 영은 목사에게 몇 마디 말을 건네고 시편을 노래한 뒤, 매우 침착하게 모자 를 끌어내려 얼굴을 가렸다. 그러고는 모여든 사람들 앞에서 교수형에 처해졌다.
정부의 위신 실추 그날 군중이 어떤 반응을 보였든, 이 공개 처 형은 이미 정부의 본질에 관한 논쟁거리가 되 어 있었다. 이 광경을 정부의 강력함을 보여 주는 증거로 받아들인 사람만 있었던 것은 아 니다. 교수형이 집행되고 2 주 후,‘ 그린리프스 뉴욕 저널( Greenleaf’ s New York Journal)’ 에 글을 기고한‘ 한 시민( A CITIZEN)’ 은 존 제이 주지사가 시민 권위의 위신을 떨어뜨렸 다고 비판했다. 처형을 위해 군대를 동원한 것 은, 무엇보다도 행정부의 방자함을 드러내는 일이었다.
이 비평가에게 군대의 등장은 행정부의 권 력 남용을 과시하는 것으로 비쳤다. 이런 광경 은 오히려 정부가 확립하고자 했던 바로 그 권 위를 훼손할 수도 있었다. 이는 당시 공화국이었던 미국에 중요한 문제 였다. 미국은 자신들의 권위가, 그들이 부패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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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고 간주했던 유럽 군주국들의 권위와 어떻 게 달라야 할지를 여전히 정립해 나가는 과정 에 있었기 때문이다.
1780 년대와 1790 년대, 미국의 개혁가들은 영 국의 이른바‘ 피비린내 나는 법률’ 을 집중적으 로 비판했다. 이는 살인부터 비교적 가벼운 절 도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범죄에 사형을 선고 하도록 규정한 법률들이었다. 1776 년 무렵, 영국에서는 거의 200 가지에 달 하는 범죄에 사형이 선고될 수 있었다. 이런 법률들은 여러 세대에 걸쳐 산발적으로 축적 된 것이었지만, 미국의 비판자들은 이를‘ 피 흘림을 핵심으로 하는 하나의 체계’ 로 규정했 다. 영국의 형벌은 공화국적 정의가 무엇을 극 복해야 하는지를 보여주는 척도가 되었다. 독 립은 미국인들로 하여금 자국 정부가 얼마나 쉽게, 그리고 어떤 상황에서 인간의 생명을 앗 아갈 수 있는지에 대해 다시 생각해보게 만 들었다.
이런 대조는 국가적 정체성을 확립해가는 과정의 일환이기도 했다. 미국인들은 영국의 가혹한 형벌을 낡고 부패한 정치 질서의 증거 로 간주한 반면, 자신들의 법은 합리적이고 비 례적이며 자유 시민에게 적합한 것이라고 여 겼다. 하지만 현실에서 이런 구분을 유지하기 란 쉽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열망은 헌법적 언 어에 반영되었다. 1784 년 뉴햄프셔주 헌법은 수많은 가혹한 피를 부르는 법률들을 현명하 지 못하고 부당하다고 규정했다. 형벌의 본래 목적은 인간을 말살하는 것이 아니라 교화하 는 것이어야 했다. 그렇다고 교화가 곧 폐지 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었다. 1796 년, 뉴욕주 는 사형에 처할 수 있는 범죄의 수를 줄였지 만, 살인죄에 대해서는 사형 제도를 그대로 유 지했다. 존 영은 다음 해 교수형에 처해졌다. 존 제이 가 비교적 온화한 형법을 선호했음에도 불구 하고, 그는 치밀하게 계획된 사형 집행을 공권 력의 필수적인 행사로 여겼다.
교훈을 얻었다는 보장 없어 다른 미국인들은 더욱 강력하게 요구했다. 필라델피아의 의사이자 독립선언서 서명자인 벤저민 러시는 살인범이라 할지라도 사형 집 행에 반대했다.
▶11면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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